인천,단기 4346년 개천절 맞아 기념행사

입력 2013년10월03일 12시27분 홍성찬
카카오톡 네이버 밴드 공유

[여성종합뉴스/ 홍성찬기자] 인천시는 3일 단기 4346년 개천절을 맞아 시청 앞 미래광장 기념식에 지역 단체장, 학생,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사, 전통의식, 개천절 노래 제창 등 행사가 진행됐다.

조명우 행정부시장은 경축사에서 "반만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도전을 이겨내고 빛나는 문화를 창조해 온 시민의 저력을 믿는다"며 "시민과 함께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다 평화롭고 번영된 인천을 물려주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장소로 전해지는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개천 대제가 열렸다.

개천 대제와 함께 칠선녀 춤 공연, 불꽃놀이, 민속놀이 등 다채로운 볼거리 행사가 진행됐다.

<네이버 첨고자료> 사적 제136호. 단군성조가 366가지에 이르는 나라 다스린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보본(報本:생겨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갚음)의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전국체전 때에는 이 제천단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특히 개천절에는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제천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민족 제1의 성적(聖蹟)으로, 마니산 제천단(摩尼山祭天壇)이라고도 한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 여러 곳에서 이미 나타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강화도 마니산에 있음.) 삼랑성(三郎城)을 쌓으시다(성이 강화 전등산에 있고 세 아들을 보내어 쌓았기 때문에 삼랑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수산집 修山集≫의 <동사 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강화의 옛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터를 닦아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이 제천단에 관한 본래의 연혁을 짐작하게 된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639년(인조 17)에 개수축(改修築)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승 신묵(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참성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내력과 여러 번 고쳐 쌓은 일을 알게 되며, 제천단에 대한 선인들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참고문헌

  • 『신단실기(神檀實記)』
  • 『대종교중광육십년사』(대종교총본사, 1971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기사

연예가 화제

동영상뉴스

포토뉴스

칼럼/기고/사설/논평

홍성찬
홍성찬
홍성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