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민의 소리] 한국 최초의 지역 문예잡지 '개척'이 발굴 공개되었다. 이 잡지는 국문학계는 물론 잡지사, 개신교 서지학, 개신교사, 인천 근대문화사 등에서 그 실체가 거론된 적이 전혀 없다. 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연구사는 이번 발굴의 성과와 의미를 국문학 학술지 '상허학보' 46호(2016. 2. 28. 발행)의 「근대문예의 토대와 확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발표했다. 또한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의 2분기 작은 전시로 '개척'을 선정해 진행 중이다.
1920년 2월 15일 인천에서 창간,발행된 잡지 '개척'은 당시 문화의 중심이던 경성(서울)이나 도쿄(일본)가 아닌 곳에서 발행된 최초의 문예잡지이다. 3․1운동 후 많은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그 중 문예잡지는 서울과 도쿄를 제외하고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발행한 잡지들 외에 국내에서는 '신청년'(1919. 1. ~ 1921. 7.)과 '서광'(1919. 11. ~ 1920. 10.) 정도의 문예지가 발행되고 있던 현실에서 인천에서 발행된 '개척'은 그 존재 자체로도 근대문학사는 물론 잡지사적인 측면에서 그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천에서 발행되었지만, 당시 도쿄에서 발행되고 있던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잡지는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한국 근대문학의 흐름이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과 당시 검열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문학을 둘러싼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10년대 이광수 이후 문학사, 즉 몇몇 동인지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근대문학사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이 잡지 발굴의 의의라고 하겠다.
1920년 2월 창간된 '개척'은 인천 내리교회 엡웟청년회 기관지로 발행된 잡지로, 천원 오천석이 발행과 편집을 책임졌다. 베스트셀러 '노란손수건'의 저자이자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것으로 유명한 천원 오천석은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잡지 편집자나 시인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잡지는 종교잡지를 표방하고 창간되었지만, 당시 사회에는 학술잡지로 널리 인식되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문학이 압도적인 문예잡지였다.
현재 한국 근대문학사의 이광수의 「무정」 이후는 '창조'와 '폐허', '백조' 등 몇몇 동인지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횡보 염상섭이 3․1운동 직후의 문학의 상황을 ‘조선의 문예부흥’으로 지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잡지와 문학작품이 발표되었다. '창조'와 '폐허' 등의 동인지도 이 때 발행된 잡지 중 일부인데, 현재 문학사에서는 이들 몇몇 동인지만이 특권화되어 있다. 이번에 발굴된 '개척'은 몇몇 동인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문학사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재검토 결과 현재 문학사 서술에 변동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살핀 뒤 보는 것과는 문학사 인식의 폭에 있어 차원을 달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잡지는 김동인과 주요한, 전영택 김환 등이 중심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와 밀접한 관련 하에 편집․발행되었다. '창조'는 이 잡지의 창간 예고 및 광고를 세 호에 걸쳐 내보냈고, 발행 후에는 매우 훌륭한 잡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개척'의 필진은 '창조' 관계자들이 상당수였고 창간 축사도 전영택과 김환 등 역시 '창조' 발행 실무자 및 필진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창조' 필진들이 인천에 와 또다른 잡지를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만큼 두 잡지는 도쿄와 인천이라는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개척'은 잡지 발행 및 작품 창작에 있어 일제의 가혹한 검열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해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문학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크다. '개척'은 발행예정일보다 45일 늦게 나왔는데, 이는 일제의 혹독한 검열에 기인한다. '창조' 3호(1919. 12. 10. 발행)에는 '개척' 발행 예고가 목차와 함께 실리는데, 실제로는 예고와는 많이 달라진 상태로 발행되었다. 이는 원고 사전 검열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제 당국의 검열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잡지 발행 전 원고가 검열에 걸리자 해당 원고를 대신하는 글과 필자를 구하느라 예정보다 한 달 반 늦게 발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가장 악법의 하나로 꼽히는 출판법과 이에 따른 검열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개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근대문학이 처했던 현실 또는 근대 작가들의 작품 창작이 매우 엄혹했고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이 잡지가 가진 또 하나의 의의는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명작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러시아 문호 막심 고리키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데카메론' 전부와 고리키 문학의 전모가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이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이들 서양문학과 서양 작가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척'의 이번 발굴은 인천 근대 문화사․문예사 서술에도 매우 큰 의의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근대 문예사에서는 1927년 2월 창간된 '습작시대'를 인천 최초의 문예지로 인식해 왔는데, 이번 '개척'의 발굴로 그 기점을 올려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개척'에는 당시 내리교회 엡웟청년회 및 임원에 관한 내용과 인천의 기업이나 상점이 낸 많은 광고가 실려 있다. 이는 1920년대 초반 인천의 문예운동이나 청년운동, 경제계에 대한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인천 가치창조 및 근대 인천학 연구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에 발굴된 '개척' 원본은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한 한국근대문학관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