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아름다운 궁중단청'이 바뀌었다 주장하는 김석배 옹

입력 2014년07월16일 10시30분 민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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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궁의 단청의 섬세하고 아름다움 그리고 웅장함 보았다.

김석배옹이 1956년 촬영했다는 광명문 단청
[여성종합뉴스] 김석배옹의 주장에 의하면 " 우리나라는 1231년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이루러 중국 몽고(蒙古)의 침약을 받어 고려의 황제가 항복(降伏)을 함으로서 몽고(蒙古)의 속국(屬國)이 되어 몽고의 臣下에 나라가 된 후 외교권(外交權), 왕세자(王世子)의 任命도 중국의 황제(皇帝)의 사전 허가(許可)없이는 불가 했다.

그 후 이조(李朝) 高宗王까지 즉위식(卽位式)은 하늘에 고하는 천제(天祭)를 못하고 사직단(社稷壇)에서 지제(地祭)인 땅신에게 풍년을 빌며 즉위식을 800여(餘)년을 지내오다 일본(日本)이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勝利)를 하자 항복조약(降伏條約)을 체결할 때 조선국(朝鮮國)은 청국(淸國)의 속국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獨立國家)가 되였읍니다,

따라서 국호(國號)룰 조선국(朝鮮國)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정하게 되였으며 당시의 고종왕(高宗王)은 황제위(皇帝位)에 올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됨으로써 1897년 현제 조선호텔 뒷마당에 있는 원구단(圓丘檀)을 지어서 여기서 하늘애게 고하는 천제(天祭)를 지내며 황제위(皇帝位)에 올랐으며 년호(年號)를 광무(光武)1년으로 시작하였읍니다.

그리고 1897년 항제(皇帝)와 황비(皇妃)의 거처(居處) 와 (寢所)인 함녕전(咸寧殿)은 왕의 거처와 침소(寢所)로, 그리고 덕홍전(德弘殿)은 외국사신의 접견, 정무에 사용 하기로 건립하였다.

광명문은 이 두건물의 입구에 광명문(光明門)을 건립하게 되였는데 당시 궁궐의 단청은 궁중(宮中)에는 악공(樂工), 무녀(舞女), 그리고 화공(畵工)이 있어서 이 화공이 황명(皇命)을 빠뜨려 황제의 거처와 외국 사신의 접견과 정무에 사용처의 문(門)인 광명문(光明門)을 건조(建造)하게 되었읍니다.

그당시 운이 좋에도 예술성(藝術性) 기능(技能)이 탁월한 화공들이 황제국의 권위를 위한 웅장한 예술성을 발위하여 그린 화려한 단청이 탄생 하였다고 단정을 하여 봅니다."

따라서 1956년 칼라 카메라로 내가 직접 찍은 이사진은 광명문이 정확하고 문화재청은 고령의 노인의 망령으로 몰지말고 국민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현재 잘못 채색된 황실의 단청을 복원해 하루속히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고 원래의 단청을 시공하여야 한다고 문화재청에 권고를 하는 바입니다.

지난 1일 덕수궁 광명문 단청 관련 여성종합뉴스의 기사를 보고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이성희 사무관은 김석배님이 주장하시는 광명문 단청의 원형에 대하여 수차례에 걸쳐 덕수궁 현장에서, 민원답변으로 서로 다른 건물임을 충분히 설명을 드렸으나 본인의 사진만 믿고 다른 옛 고증사진과 자료는 믿으려 하지 않고 있는데도 우리 청에서 확인도 않고 변명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주장입니다.

물론 우리청에서는 같은 민원으로 감사원 감사도 받았고 언론기관 등에도 설명을 드려 이미 다른 건물임이 검증되었습니다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유산 복원을 위해 한 민원인의 제의를 가볍게 들으려는 것보다 다시 한번 고증하고 검토해야 할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연속 기획으로 다뤄 보고자 한다.

또 민원인이 10여년에 걸쳐 민원을 제기 하고있다면 궁능 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자존심과 문화유산 보고를 위해 정확한 자료와 연구가 요구된다.

본 기사는 고령의 사진작가 우리나라 최초 칼라사진 작가의 사진자료를 토대로 문화재청과의 10여년에 걸친 광명문 단청 월래것이 아니라는 민원제기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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